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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우범선에 대한 글입니다~~
조선육군훈련단 제2대대장
급진적 계몽주의 단체입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법을 전수한 미우라 대신과 친분을 쌓았고, 명성황후 시해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친일 활동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애국지사였던 아들 우장춘의 공헌으로 아버지로 자주 기억된다.
1857년 5월 24일 충청도 단양군
(현 충청북도 단양군) 군인 가족에게. 시험에 합격한 후 황해도 청단찰방(靑丹察訪)에 있었고 강화도 김옥균과 계약을 맺은 후,
이주회 등과 교류하면서 건국론을 주장했다.
조선 수교가 성립되고 근대화 운동이 본격화되자 조선 정부는 군사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군제 개편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른바 별기군(別技軍) 창설이었다. . . 우범선은 별기군이 조선의 군사제도를 근대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참여하였다.
별기군 참명을 지내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온 적도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으로 잠시 정권을 잡았을 때 곤경에 처해 검거되었는데, 이미 일본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를 동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민씨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자 우범선은 평안북도 순천으로 유배 생활하다 평시지사 민병석의 도움을 받아 장위영지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략하여 민정권을 축출하자 일본에서는 개화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우범선은 군정비서관이 되어 갑오개혁에 참여했다. 1895년 4월 일본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의 제안으로 훈련소가 설치되자 그는 제2대대장으로 선출되었다.
1895년 5월 김홍집이 사직하고
박정양 내각이 들어섰다. 이때 일본의 전매권 확립에 반대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단의 정치세력이 결성되기 시작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이용해 박영효를 축출하려 했다. 이때 박영효 등 친일세력은 훈련병을 이용해 궁궐을 점거한 뒤 고종 전복을 모의한다. 이때 우범선도 박영효의 쿠데타 계획에 동참한다. 그러나 곧 음모가 새어나와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일본으로 도피했다.
1895년 7월 명성황후군은 러시아 장관 베버와 손잡고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대신 친러세력을 고용하려 했다. 9월 1일 이노우에 가오루 장관이 미우라 고로 장관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미우라는 우범선을 만나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물었다. 이에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나는 무부다. 내 정치적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의 정치개혁이 당의 우방을 당장 말살하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정책이 나올 텐데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제 친일 정권.
계획은 9월 20일경에 구체화되었습니다. 즉, 훈련소를 해산의 위기에 처하게 하고 일본 공사관의 구스노세(楠瀨幸彦)와 결탁하여 대원군을 끌어들여 일본 대륙 로닌을 서울장기말로 배치하여 쿠데타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이에 미우라는 일본군이 훈련하는 훈련소장 이두황 1대대장, 2대대장 우범선, 3대대장을 맡는다.
이진호(李軫鎬) 전 군사협상관 이주회(李軫鎬)가 우범선의 훈련소 동원을 맡았다. 즉, 명성황후 시해계획의 주동자는 마쓰무라, 구스노세,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 일본 공사관과 우범선 등 친일파였다.
10월 7일 고종은 해고령을 내려 훈련소를 해산시켰고, 미우라는 훈련소를 책임지고 있던 우범선에게 병력을 동원하라고 지시하며 일을 추진했다. 10월 8일 새벽 4시 30분경 우범선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내고 궁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대원군 앞으로 나갔다.
“대원위 대장의 인사. 훈련부대 대대장 우범선입니다.
그리고 대원군을 사인교 위에 놓고 궁으로 들어갔다. 대부분 로닌인 궁전의 침략자들은 긴 일본도와 하카마 하오리를 휘두릅니다. 일본공사관 주둔군이 그 뒤를 이어 참령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병대가 뒤따랐다. 훈련 특공대는 특수 군복을 입고 장총으로 무장했습니다.
경복궁을 침공한 한성신보사 원장 아다치 겐소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분대는 경회루를 통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옹화문을 향해 돌진하고, 수련대는 뒤에 남고 주력인 우범선 낭인분대는 좌익의 후방을 엄호했다. .
명성황후의 생김새가 생소한 일본 여성들은 오랫동안 그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데라자키(寺崎泰吉)라는 남자가 명성황후를 칼로 쳤고, 일본군 미야모토와 마치는 이를 지켜보았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미우라 대신은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의 시신을 살펴보고 오기하라(荻原秀次郞)에게 신속히 화장하여 증거인멸을 명했다.
오기하라는 귀족들을 이끌고 옥호루 동쪽 소나무밭에 명성황후의 유골을 화장했고, 윤석우(尹錫禹)는 우범선의 명을 받아 정전에서 유골을 거두어 땅에 묻었다. . 이로 인해 Volksmutter에 대한 암살 시도가 끝났고 같은 해 9월 훈련소가 해체되고 SS가 창설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13일 참령 이두황 1대대장과 참령 우범선 2대대장이 해임되었고, 이범래와 이진호가 각각 1대대장과 2대대장으로 승격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전국적으로 國母報讐의 기치 아래 의병들의 폭동으로 항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우범선은 이두황, 장박, 유길준, 유혁로, 권동진, 이진호, 정일우와 함께 일본으로 도주했다. 난교와 황철.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도쿄 혼고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인 여성을 만나 결혼하여 아들 우장춘을 낳았다. 그러나 우범선과 같은 소위 ‘을미도망자’들은 현상금을 걸고 국내에 파견된 자객들로 인해 늘 암살당할 위험 속에서 살았다. 당시 박영효가 한국에서 윤효정(尹孝定) 등 고등학생을 가르쳤던 고베의 조일신숙(朝日新塾)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일신숙이 해산되자 우범선은 1903년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로 이주하였다.
당시 만민회 사건과 화약음모 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도주한 고영근 전 만민회 회장은 1903년 7월 식당 손님으로 오사카에 있는 윤효정을 찾아왔다. 윤효정으로부터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죽인 괴물 우범선이 일본에 망명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고영근은 일찍부터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관직을 맡아 명성황후의 비호 아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 결과 그는 ‘국모보존'(國母報讐)이라는 사상을 내놓았다. 그가 이 행동을 하면 고종의 은혜를 되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누렸던 권력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에서 귀국하기 위해 대반전을 계획하고 온 것이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먼저 윤효정에게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털어놓으며 의심을 누그러뜨렸다. 이후 매우 친해졌고 우범선은 고영근에 대한 의심을 아예 멈췄다. 먼저 우범선이 살던 구레시에 집을 얻어 거주했다. 그러던 중 1903년 11월 24일 고영근은 우범선을 집들이에 초대했다.
집들이에 오자 고영근은 미리 준비한 단검으로 그의 목과 어깨를 찔렀고, 고영근의 시종인 노원명(盧遠明 or 魯允明)은 몽둥이로 여러 발을 쳤다. 머리에 시간. 그 결과 우범선은 타국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를 살해한 고영근·노원명은 곧바로 히로시마 경찰서에 자수했고 ‘시어머니에게 보답하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한편 고영근이 우범선을 처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가진(金嘉鎭) 중앙위원장은 “우범선이 죽인 도주범 고영근이 일본에서는 충성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즉각 일본공사관에 문의해 명성황후와 세계인의 한을 풀어줄 것을 당부했다. 이재극(李載克) 법무부 장관도 고영근의 무죄를 선고했다.

훗날 좌파 독립운동가 김철수는 우범선의 행적을 우장춘에게 전하며 자신이 조선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지은 죄에 대한 속죄에 이바지하고 자신의 성을 바꾸지 말 것을 일깨웠다.
–지식백과사전에 정리된 글–
